NOTIC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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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포일러가 될 수 있음


메인스트림 영화일수록 더더욱 그러하듯 보통 영화의 선악 구도는 주로 가진 자와 가지지 못한 자의 구도를 가져간다
. 허나 <똥파리>는 제목 그대로 가지지 못한 자들만의 뒤엉킴이고, 법 앞에 평등하지 못하고 부를 쥐지 못한 그들 사이의 차이가 있다면 폭력이라는 비합법적 권력의 개입일 뿐이다.

사실 감독이 말하고자 하는 건 선악 구도가 아니다. 정확히 말하자면 그들 모두가 이 사회에게 핍박 받는 피해자라는 것인데, 물고 물리는 관계에 있어서 가진 자와 가지지 못한 자가 아니라 오히려 가지지 못한 그들만의 관계에 집중하고, 단순히 폭력의 먹이사슬 위에 있는 자들을 비난하기보다 한보 더 나아가 그러한 구도를 양산해내는 사회적 구조에 집중하는 관찰자의 모습을 보여준다. 사회의 먹이사슬 밑바닥에 있는 상훈이가 패대는 사람들은 이 시대의 가난한 대학생이고, 정말 더 물러설 수 없는 벼랑 끝에서 사채까지 끌어다 쓰고 갚지 못하는 사람들일 뿐이다. 사실 우리가 가만히 생각해보면 양지보다 음지에서의 자본과 권력의 핍박은 없는 자들의 물고 물어뜯는 개싸움의 전형이나 다름없다. 상훈과 영재를 슬프게 하는 건 가진 자들이 아니라 결국 같은 바닥에 전전하는 서로에게 주는 고통과 같다. 그 개싸움을 가진 자들이 관망하겠지. 마치 그들만의 거칠고 치열한 경기장에 있는 관중처럼. 이건 곧 날 것 그대로가 주는 하류인생 감수성이다.




핸드헬드로 뽑아낸 상훈이와 연희의 데이트 장면은 온전한 가족의 모습을 만들어가는 과정이다. 시장 바닥을 돌아다니거나 조카 형인이의 장난감을 사주는 장면에서 관객은 3자적 입장에 놓이고, 관객조차 개입하지 못하게 풍경그 자체로 놓는다. 말 그대로 그들이 삶의 먹이사슬에서 벗어날 수 있는 시간. 그건 곧 이 시대의 온전한 가족이 주는 아주 평범한 풍경인데 그들에겐 더할 나위 없는 행복이다. 그들에게는 쉽게 허락되지 않았던 일상이니까.

<똥파리>의 주인공들이 겪는 고통은 사실 가족의 상실에서 온다. 삶의 밑바닥에서 그들이 마지막으로 쥘 수 있는 끈이 사라졌고 상훈의 핏줄들(이전의 그들에게 가족이라는 표현이 어울리지 않기에)과 연희는 서로에게 의지할 수 있는 가족을 만든다. 웰메이드 <가족의 탄생>이 있었다면 이건 그야말로 '언더그라운드 가족의 탄생' 이랄까. 눈물은커녕 상욕이나 주고받던 상훈과 연희는 각각 비참한 감정의 끝을 봤던 그 날, 한강에서 서로에게 의지하고 꺽꺽대며 눈물을 보이는 건 결국 그들이 느끼는 가족다운 가족에 대한 절실한 갈망이다.

상훈이가 환멸을 느끼고 용역 일을 그만 두기로 한 날, 마지막으로 일을 나간 집에는 공교롭게도 자신과 이름이 같은 꼬맹이가 있다. 슬픈 눈의 상훈은 무엇을 떠올렸을까. ‘우물쭈물함을 싫어하는 상훈이가 우물쭈물하게 만들 정도의 그 무엇은 영화 말미에 보이는 연희의 눈과 같았을까. 두 사람의 눈에 보인 건, 폭력 때문에 엄마와 여동생을 잃었음에도 마치 그 당시의 그처럼 이름이 같은 그 꼬마에게 폭력을 안겨주러 온 자신과, 용역 깡패 때문에 엄마를 잃었음에도 불구하고 같은 일을 하고 있는 동생 영재의 모습. 마지막으로 관객에게 던져주는 서글프고 직설적인 메시지는 결국 사회가 끊지 못하는 폭력의 대물림이다. 사회의 밑바닥과 같은 똥을 벗어나지 못하는 똥파리들의 모습을 2시간동안 관망하면서 우리가 느낄 수 있는 건 사회적 책임감과 같은 것이었을까. 글쎄, 적어도 내가 느낀 먹먹함은 그러했다. 마지막 상훈이의 원망 섞인 눈빛을 쉽게 잊을 수 없는 것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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