NOTICE 


65호 시사인에 있는 랑시에르 인터뷰. 솔직히 말해서 내용의 반이나 이해했나 모르겠다. 뭐 이렇게 어려운고. 다만 몇 구절이 굉장히 인상 깊어서 느낀 바 몇 자 적는다.

 

최:그런 의미에서 미학에 대한 당신의 새로운 생각은 ‘정치적 전복’과 연결된다. ‘감각적인 것의 분배’는 당신의 이론적 작업 안에서 중심이 되고, 불가능성·이질성 등과 밀접하다. 우리는 통상적으로 미학의 개념을 근대 철학의 개념과 연결시키지만 당신은 ‘미학’을 ‘정치’와 마찬가지로 희랍적 어원에 관련해 분석하면서 그 의미에 대해 새롭게 사유하려 한다. 이런 작업이 당신의 이론 안에서 어떤 의미를 갖는가?

랑시에르:서양 철학은 언제나 그리스를 참고한다. 따라서 희랍적 개념들을 어떻게 번역하고 해석하며 받아들이는가 하는 것은 매우 중요한 문제이다. 그런 의미에서 내가 아리스토텔레스의 정치학을 참고하는 이유는 로고스, 데모스, 통치 따위 개념을 그 어원에서 새롭게 분석하고 그러한 개념들이 역사적으로 거쳐온 분절에 관해 새롭게 생각해보기 위해서다.

예를 들어 일반적으로 정치란 로고스를 가진 자들의 통치, 곧 어떤 자격과 능력이 있는 자들의 통치로 간주되는 경향이 있다. 하지만 나는 이러한 관념에 대해서 새롭게 사유하고자 한다. 많은 논자들이 일반적으로 말하는 것처럼 정치란 단순히 언어나 소통에 의거해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다. 내가 생각하는 민주주의란 통치할 자격이 없는 자들의 통치, 곧 평등 그 자체를 목적이 아니라 하나의 전제로 이해하는 정치적 사유를 말한다.

정말 그렇다고 생각한다. 정치란 곧 통치로 간주되는 시대는 갔다는 것인데, 마치 진중권이 말하듯 지식인이 대중의 머리 위에서 군림하고 가르치는 시대는 끝났다는 것과 비슷하다. 지식인이 곧 그들과 호흡하고 행동해야 하듯이 결국 민주주의도 자격과 능력 있는 자들 간의 합의에 기초한 통치에서 끝날 일이 아니라 통치 자격이 없는 이들, 즉 대중들의 참여와 개개인의 정치적 사유화로 이뤄져야 한다는 것을 말한다.

 

최:정치에 대한 당신의 접근 방식은, ‘목소리를 갖지 못한 사람들’의 목소리를 찾아주는 것으로 이해된다. 알다시피 2008년 한국에서는 미국산 쇠고기 수입에 반대하는 촛불집회가 있었다. 예를 들어 이러한 촛불집회에 비판적이었던 한 정치인은 이를 ‘천민민주주의’라는 신조어로 표현하기도 했다. 대의민주주의에 의해 선출된 그 정치인 스스로가 민주주의라는 개념 자체에 대해 무지하다는 사실이 내게는 적잖이 충격이었다. 이러한 상황에 대해 느끼는 바나 몇 가지 첨언할 수 있는 부분이 있으리라 생각된다.

랑시에르: 미국산 쇠고기의 수입을 단순히 그 문제와 관련된 전문가들만의 문제로 보지 않았다는 것이 중요하다. 특정한 정체성을 지닌 전문가 집단이나 정부만의 문제가 아니라 아무개·모든 이의 문제로 이해하는 것이다. 그것은 사적인 문제가 아니다. 공공 건강의 문제, 곧 공적 영역의 문제다. 정치적 주체화는 이렇듯 특정한 이슈로부터 시작해 그것을 공공의 이슈로 만들어내는 과정 안에서 발생한다. 정치적 주체는 특정한 사회적 신분이나 지위에 의해서 미리 결정되는 것이 아니라 이러한 주체화의 과정을 통해서 만들어진다. 인민의 힘은 인민의 힘없음으로부터 출현하며, 이렇듯 몫을 가지지 못한 자들이 자신의 몫을 주장하는 과정 속에 정치적 주체화의 과정이 존재한다.

그것을 이해하는 과정은 간단하다. 키워드는 쇠고기와 촛불집회. FTA에서 시작된 정치적 발화점은 우리의 삶과 밀접한 먹거리, 즉 쇠고기로 번졌고 그것은 곧 개개인의 정치적 사유화로 이어졌다. 단순히 특정 전문가들이 연구 자료만 돌려막으며 왈가왈부했던 것이 아니라 촛불집회로 인해서 대중이 곧 전문화됐다. 그리고 그 전문화의 출발은 특정 집단의 정치적 문제가 아니라 모든 이와 관련된 문제로 인식하고 접근했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다. 정치적 주체화로의 발전이 이뤄질지는 조금 더 지켜봐야겠지만 말이다. MB가 우민정책 펴는 걸 보면 더욱 기대가 크지 않은가. 그만큼 움찔했다는 뜻이니까.


최:그런 의미에서 <프롤레타리아의 밤>은 당신의 이론적 여정 안에서도 일종의 전환점을 이루면서 매우 각별한 위치를 차지하는 듯하다. 노동자의 문서고, 곧 그들이 직접 쓴 기록들에 천착하는 작업은 여전히 중요하고 신선한 문제다. 특히 한국에서는 이주노동자 문제가 사회적으로 부각된 지 오래이다. 이들의 목소리를 듣고 또 그들에게 자신의 목소리를 찾아주는 작업은 어떤 의미에서 중요한가?

랑시에르:자전적인 글 또는 대중·인민의 문화에 대한 글 등 이른바 노동자 문학 혹은 노동자들의 글쓰기는 그들만의 목소리가 표현되는 영역이다. 이러한 목소리란 무엇인가 하는 문제는 내게 매우 중요했다. 합의에 기초한 정치의 관점에서 보면 사회구성원이 모두 똑같은 목소리와 똑같은 언어로 이야기하기를 원할 것이다. 그러나 그들만의 목소리를 듣는 작업과 그들의 목소리가 과연 무엇을 의미하는가 하는 문제는 불화와 불일치에 기초한 민주주의라는 관점에서도 특히나 중요하다.

나 또한 이 시대의 글쓰기 영역이 가장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그 중에서 어떻게 보면 칼럼보다도 현재 우리 문화에 기초한 문학이 더더욱 그러하지 않을까 싶다. 그냥 간단히 말해 대중이 느끼는 접근성의 차이랄까. 잘 쓰여진 문학적 파급력이란 상상 이상이니 말이다.

 

좀 어려운데 읽어볼 만하다. 아래는 인터뷰 전문 링크.

http://www.sisain.co.kr/news/articleView.html?idxno=339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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