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다양한 시위 속에 살고 있다. 각 단체의 이해관계가 얽힌 대형 시위부터 국회 앞 외로운 1인 시위까지 차가운 발걸음을 재촉하는 출근길 사이사이로 핏대 선 목소리가 스며든다. 작년 초 대중과 호흡한 촛불시위는 시위와는 거리가 멀었던 사람들마저도 자신의 안위, 혹은 가족의 안위를 위해서 목청 높여 구호를 외치고 손과 손으로 이어지는 촛불로 그 열정을 이어갔다. 일부 폭력적인 양상의 시위도 있었지만 ‘촛불문화제’라는 이름도 붙일 정도로 2008년 촛불 시위의 성격은 소풍이나 나들이와 비슷했다. 대중이 TV에서만 접하던 시위의 모습은 ‘무서워 보이는 아저씨들’이 삼삼오오 모여 두 손 높이 들고 구호를 외친다던가, 간혹 그 열의가 어긋나고 과격한 방향으로 번져 전경과 부딪히고 싸우는 장면들에 익숙해져 있었다면 촛불시위는 ‘시위’라는 단어가 가지고 있던 부정적인 이미지를 탈피하는데 큰 도움이 됐다. 단순히 간접적으로만 접하던 시위 문화를 직접 ‘체험학습’을 통해 겪었으니 MB의 직접적인 ‘대국민 교육’에 다시 한 번 박수를 보내지 않을 수 없다.
얼마 전에 영화배우 문근영의 기부를 두고 ‘빨치산 선전용’이라는 매치도 안 되고 심지어 재미도 없는 표현까지 써가며 색깔론을 들이댄 보수논객(이라고 자처하는) 지만원이 이번엔 전태일을 타겟으로 잡았다. 전태일은 몸에 신나를 뿌리고 ‘불화살’이 되어 정부를 공격했고 그것은 결국 좌익이 좋아하는 ‘시체놀음’이라신다. 그리고 당시 17명의 ‘불화살’과 같은 ‘시체놀음’은 결국 ‘시체생산’을 조종하는 배후세력이 있다고 하신다. 이 참을 수 없는 표현의 경박함. 이분이야말로 왕비호를 넘어서 10만 안티 양병에 더욱 근접한 인물이 아닌가 싶다.
얼마 전에 작가 오도엽이 엮어낸 <지겹도록 고마운 사람들아>를 읽은 바 있다. 그 책에서 전태일의 어머니인 이소선의 말이 아직도 가슴 언저리에 머물러 쓰라리다. 아들 전태일에 대한 말씀 중 한 구절이다.
태일이는 참 사람을 좋아했어야. 이 말 하니까 생각난다. 배웠다는 사람들이 나한테 와서 열사님은 어떻고 저떻고 하는데 그게 말이냐? 어느 부모에게 자식이 열사겠냐. 그냥 아들이야. 태일이는 열사도 투사도 아닌 사람을 너무나 사랑했던 사람이야.
그라고 분신자살 했다고 한다. 어디 자살이냐. 항거지. 분신 항거라고 해야 해. 배운 사람들이, 기자들이 자살했다고 쓰는 것 보면 배우기나 한 건가 그런 생각이 들어. 그래서 태일이를 열사니 투사니 하지 말고 그냥 동지라고 불러 줬으면 해. 전태일 동지. 그게 맞지 않냐. 태일이는 지금도 노동자 여러분들과 함께 있는 동지라고, 제발 그렇게 불러 달라고 좀 써라.
열사니 투사니 해도 몸 전체에 신나 뿌리고 손에 불을 든 상황에서 의연할지언정 죽고 싶어 하는 이는 없다. 17명의 사람 중에 한 아이의 부모도 있었을 것이며 전태일과 같이 부모에게 효도하고 자기 일에 성실한 청년도 있었을 것이다. 손에 불을 들고 단 몇 초 안에 자신의 몸이 불에 휩싸일지도 모르는 상황에서 어머니의 구수한 된장찌개 생각이 나거나, 한 아이의 부모는 그 시간에도 집에서 자신을 기다리는 금쪽같은 아이의 웃음소리가 귀언저리에 맴돌았을지도 모른다. 그들은 죽고 싶어서 죽은 것이 아니다. 다시 말하지만 그들의 죽음이 ‘분신자살’이 아니라 ‘분신항거’라는 말이다. 그들이 자신의 소중한 사람들을 뒤로 한 채 그렇게 죽음 앞에 설 수 밖에 없었던 기형적인 사회구조를 탓해도 부족한 시간에 ‘시체놀음’과 같은 저속한 표현의 빌려 글을 쓰는 일이야 말로 자신의 경박함이 일정 한계점을 지나 얼마나 바닥을 치고 있는지를 보여주는 ‘만원의 재구성’에 불과하다. 굳이 재구성 없이도 당신의 시대착오적인 발상은 여러 경로를 통해 익숙한데, 이거야 원 과잉친절이다.
애초에 방향 설정도 틀렸다. 그들의 분노 섞인 불화살은 정부가 아니라 대중에게 날아간다. 대중적인 관심이 없다면 콧방귀도 안 뀔 정부라는 것, 날아가다가 힘을 잃어 떨어지리라는 것은 그들도 분명히 알고 있다. 이 같은 점이 17명의 분신항거가 있던 당시가 지금보다 더 하면 더 했지 덜 하진 않았을 것이다. 대중에게 날아간 불화살은 그들의 냉담한 가슴에 새로운 발화점을 지핀다. 무관심 사이에서 고개를 든 의구심은 대중에게 있어 ‘부끄러움 유발자’며, 무관심이 새로운 부끄러움으로 변하는 순간 방관자에서 참여자가 된다. 이 같은 점은 정부와 경찰이 허위사실을 유포하며 제 2의 촛불시위를 두려워하는 것을 보면 확실히 증명된다.
당신 말처럼 그들의 불화살이 정부에게 바로 날아갈 수 있다면 촛불시위하는 모습도 안보고 얼마나 좋은가. 당신은 촛불 혐오증이 있고 나는 이 추위에 덜덜 떠는 그들을 보며 안타까움을 느끼니 서로의 눈에서 촛불시위가 사라지면 이 얼마나 이득인가. 10만 안티 양성하는 글은 그만 쓰시고 당신의 생산적인 행동으로 일거양득의 소산을 꿈꿔보자. 이거 참 괜찮은 제안 같지 않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