멀쩡히 군에 있는 줄 알았던 아들이 사라졌단다. 탈영이라니. 아무래도 찝찝하다. 직접 군에 가서 아들의 잠자리와 소지품도 살펴보고 남아있던 휴대폰을 조사해 엉켜있던 사진과 영상들을 뜯어낸다. 그러던 와중에 아들은 처참한 토막 시체로 발견되고 그렇게 그의 삶은 서서히 흔들리고 가속한다.
영화는 다양한 측면에서 접근한다. 더러운 전쟁에 한방, 전쟁 후유증을 간과하는 사람들에게 한방, 전쟁을 일으킨 자들에게 한방, 각각 스트레이트로 꽂아주는 계몽적 비판과 동시에 엎치락뒤치락 스릴러의 면모를 보여준다. 꾸준히 따라가면 노년의 성장영화이기도 하다.
하나. 군대라는 집단이 주는 비인간성. 이라크라는 공간에서, 더 넓게 전쟁이라는 야만적인 행위에서 무엇을 잃는가. 젊은이들의 순수한 애국심을 무기 삼아 미국 정부는 그들에게 무엇을 저질렀는지 알아야 한다. 포로를 잡아 그들의 고통을 희롱하는 반휴머니즘, 아이를 죽일 수밖에 없는 명령과 복종의 매커니즘. 영화 속 대사처럼 지옥에서는 괴물이 될 수밖에 없다. 영화는 직간접적으로 그 지옥은 누가 만들었냐고 묻는다. 지옥 같은 시위 현장에서 괴물이 되어버리는 전의경들. 하지만 그 지옥을 누가 만들고 있는지 모두가 안다. 단순히 눈앞에 폭력을 비난하고 모른 체 할 뿐이지.
둘. 어떤 이들은 전쟁 후유증을 간과한다. 그깟 총 좀 쏘고 온 게 대수냐고. 평소 개를 좋아하던 남편이 개를 익사시켰다며 하소연하는 여자를 무시하듯 말이다. 여자는 경찰에게 도와 달라, 남편에게 정신과 치료가 필요하다 부탁하지만 대수롭지 않게 여겨진다. 결국 남편은 아내마저 그 개처럼 죽이고 만다. 카메라 속 스치듯 지나가는 사진은 그도 퇴역 군인이었음을 보여준다. 그는 잔인한 살인 사건의 가해자지만 또 한명의 방치된 전쟁후유증 피해자이기도 하다. 우린 그렇게 그들의 고통을 외면했기에 방황하다 어지러운 사회 속에 잠식하고, 어느새 다른 고통을 되새김질한다.
그도 퇴역 군인이었다
셋. 미국에 대한 미국 감독의 냉철한 고백. 이라크의 자유와 테러 박멸을 핑계로 그들은 원유를 확보하고 중동 정치구도를 재편했다. <몬스터>에서 요한은 덴마에게 이렇게 말한다. ‘날 봐! 내 안에 몬스터가 이렇게 커져 버렸어!’. 감독도 그처럼 말한다. 미국 안에 괴물이 너무 커져 버렸다고.
넷. '꼰대'도 변한다. 미국 지상주의, 성차별주의, 인종차별주의를 고루 갖추고 있던 그가 아들이 타지에서 겪은 고뇌를 추적하며 미국을 되돌아보고 국가에 대한 자긍심에 의문을 던진다. 권위적이던 그는 여형사와 다니면서 교감하고, 아들 또래의 멕시코 아이에게 인종차별적인 언행을 사과한다. 늦은 나이에 그는 삶을 통해 또 한 번 성장했다.
거꾸로 달린 성조기
결국 이건 미국이 지니고 있는 부조리에 대한 양심적 고백이다. 성조기를 거꾸로 매다는 것은 ‘국제구호 신호’ 란다. 위기가 닥쳤는데 해결할 수 없으니 도와달라고. 평소 거꾸로 매단 성조기를 고쳐 달아주던 그의 자긍심은 누그러들었다. 오히려 멀쩡한 성조기를 거꾸로 달기 시작한다. 미국은 그렇게 파멸로 치닫았다. 그리고 그 안에 양심적 지성들은 말했다. 어떻게든 변해야 한다고. 그러니 오바마가 당선됐겠지. ‘CHANGE’ 라는 구호 아래 응집된 그들에게 변화는 필수불가결한 선택이었다.